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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씽크 - 오래된 생각의 귀한>, 스티븐 풀
p150~153
합리주의는 데모크리토스가 원자의 필요성을 이해했듯이 순전히 사고만으로 현실의 근본적인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는 아주 오래된 사상이다. 그래서 대개 경험이나 실험에 의존하는 경험주의와 수사적 측면에서 배치된다. 모든 부문에서 증거와 빅 데이터를 토대로 삼는 오늘날에는 경험주의가 전부이고 합리주의는 지나간 시대의 미신처럼 보일 수도 있다. ‘경험적’이라는 말은 거의 믿을 만하다거나 옳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었다. 반면 ‘탁상 공상’은 대개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진전도 이루지 못한다는 경멸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실은 진전을 이루는 경우가 아주 많다.
우선 순수한 사고의 정교화로 이뤄지는 수학은 현실과 대단히 신비로운 관계에 놓여 있다. 수학에서 소수素數의 분포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의 증명 같은 발견은 명백히 옳으며, 우리가 세상에서 접하는 모든 것과 무관한 듯 보인다. 기이한 점은 수학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물리적 자연 ‘법칙’을 기록하는 언어이기도 해서 대부분의 과학과 공학에 토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너무나 기이한 나머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는 1960년에 <자연과학에서 수학이 지니는 불합리한 유효성The Unreasonable Effectiveness of Mathematics in the Natural Sciences>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논문까지 발표했다.) 또한 프랭크 윌첵이 보여준 대로 수학적 미를 좋아하는 성향이 대단히 유용한 아이디어로 향하는 정확한 지침이 되는 경우도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숱한 이론들은 마침내 입증되기 오래전부터 수학적 대칭성(윌첵이 말하는 ‘미’의 구체적인 정의)을 선호하는 방향에 따라 수립되었다. 가령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은 헤르츠가 전파를 생성하여 입증하기 전까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보이지 않는 새로운 색의 광선’을 예측했다. 또한 폴 디랙Paul Dirac은 반입자反粒子의 존재를 예측했다. 이밖에도 많은 사례들이 있다.34 역사 전반에 걸쳐 많은 과학자들에게 인간의 이성으로 우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뉴턴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소위 이신론理神論적 관점에서) 이성적인 설계자, 반드시 인간의 세상에 개입하는 신이 아니더라도 우리 같은 이성적 존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애초에 합리적 원칙에 따라 만물을 구성한 존재가 있다고 주장했다. 창조주라는 개념을 거부해도 이성의 힘으로 자연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은 하나의 신조였다.
탁상 공상도 앤드루 폰천이 말한 대로 “꾸며낸 것”처럼 보이지만, 뒤이어 아주 정확한 예측으로 드러난 우주팽창론을 낳았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화려한 성공을 거둔 탁상 공상은 아인슈타인이 수립한 상대성이론이었다. 폰천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중력 공식은 대부분 순수한 사고에서 나왔다. 그는 “이 공식으로 수성(의 궤도)과 빛의 굴절,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볼 수는 없지만 중력 방정식이 성립되도록 만드는 색다른 유형의 물질인 암흑물질이라는 아이디어도 주어진 증거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를 고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폰천은 “은하계가 그렇게 움직이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타당성이 확인되면 이론가들이 넘겨받아서 ‘여기서 결부되고, 이렇게 생성되니까 다음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죠. 이처럼 새로운 예측이 제시된 후에는 다시 검증이 이뤄집니다.”라고 설명한다. 이런 식으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는 서로 적대적인 사상이라기보다 하나의 태그 팀으로 멋지게 일할 수 있다. 1,000년 전에 나온 탁상 공상(원자와 다중우주의 경우)은 오늘날 과학의 첨단에서 놀랍도록 유효성을 발휘한다. 신조에 토대를 둔 합리주의가 증거와 데이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실험을 하는 데 필수적인 경우가 많은 폭넓은 수학적 모형화와 모의실험을 수반하는 현대의 컴퓨터 매개 과학이 여기에 해당된다. 가령 거대 분야로 성장 중인 생물수학은 모형을 활용하여 훨씬 세밀하게 세포의 행동을 구현한다. 또한 현대의 소립자 물리학에서는 이론과 실험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물리학 분야의 실험은 지난 100년 동안 크게 변했다. 19세기 말의 과학자들은 실험실 탁자 위에 설치한 기구로 전자기파를 만들고, 금 박판에 감마선을 쏘고, 거대한 황동 망원경으로 빛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이제 소립자 물리학자들에게는 지하 27킬로미터에 걸쳐 설치한 원형의 초전도 자석인 유럽공동원자핵연구소CERN의 강입자 충돌기가 필요하다. 이 인상적인 시설에 있는 측정 도구는 수많은 이론을 동원해 설계한 극도로 복잡한 기구다. 이 기구가 측정한 내용은 작동 양상을 설명하는 컴퓨터 모형에 따라 해석된다. 뒤이어 아원자 입자가 행동하는 양상에 대한 모형과 컴퓨터로 생성한 방대한 데이터를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모형이 활용된다. 이 경우 과학적 ‘관찰’이라는 개념은 탁자 위에서 물리학 실험을 하던 시대보다 훨씬 복잡해진다. 여러 상호의존적인 모형 및 이론 사이의 상호작용을 토대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철학자인 마거릿 모리슨Margaret Morrison은 “실험에서 이뤄지는 측정에 대한 생각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35
수학을 활용하여 모의실험에서 현실의 측면을 반영하는 모형을 수립하고, 그 결과를 활용하여 실험 내용을 파악한다면 빅 데이터와 순수한 추론은 유례없는 공생적 융합을 이루게 된다. 우리 시대에 실험과 이론 사이에 그어진 선은 재고를 통해 사라지고 있다. 다중우주가 첨단 우주론이자 고대의 논리적 필연이었듯이 강입자 충돌기는 현대의 산업적, 과학적 탐구를 위한 엄청난 도구이자 순수한 플라톤주의를 반영하는 기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