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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의 간략한 역사

Procruztes 2019. 2. 23. 14:21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93~99
... 새집을 장만한 젊은 부부가 건축가에게 앞마당에 잔디를 깔아달라고 요구한다고 치자. 왜 잔디를 깔려고 할까? "잔디밭은 아름다우니까요." 부부는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그들은 왜 그렇게 생각할까?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석기시대 수렵채집인들은 그들이 거처하는 동굴 입구에 풀을 심지 않았다.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로마의 신전,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 베이징의 자금성..... 이중 어느곳에도 방문객들을 반기는 푸른 목초지는 없다. 개인의 집과 공공건물 입구에 잔디를 심는다는 생각은 중세 말 프랑스와 영국 귀족들의 저택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이 습관은 근대 초기에 깊이 뿌리 내려 귀족을 상징하는 표식이 되었다.

잘 관리된 잔디밭을 갖기 위해서는 땅은 물론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잔디 깎는 기계와 자동 스프링쿨러가 없던 시절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잔디는 그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로 가치 있는 것을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심지어 동물을 풀어놓을 수도 없는데, 동물들이 풀을 뜯어먹고 짓밟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농부들은 잔디 따위에 귀중한 땅과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대저택 입구에 깔린 정갈한 잔디는 따라서 누구도 위조할 수 없는 지위의 상징이었다. 잔디는 지나가는 모든 행인에게 당당히 공표했다. '나는 부자이고 힘이 있다. 그리고 이 푸르른 사치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땅과 농노를 소유하고 있다.' 잔디밭이 넓고 잘 정돈되어 있을수록 힘 있는 가문이었다. 어느 공작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의 집 잔디밭이 형편없다면 그가 곤경에 처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귀한 잔디밭은 중요한 축하연과 사회적 이벤트들이 열리는 무대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엄격한 제한구역이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궁전, 정부청사, 공공장소에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단호히 명령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내가 다닌 옥스퍼드 대학교에는 사각형 모양의 안뜰 전체가 크고 매력적인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1년에 딱 하루만 그곳에 들어가 걷거나 앉을 수 있었다. 다른 날 그곳에 들어가 그 성스러운 잔디밭을 모독하는 가련한 학생에게는 화가 닥쳤다.

왕의 궁전과 공작의 대저택은 잔디밭을 권위의 상징으로 바꾸었다. 근대 후기 왕들이 끌려내려 오고 귀족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된 뒤에는 대통령과 수상들이 그 잔디밭을 관리했다. 의회, 대통령의 거처, 그밖의 공공건물들은 줄을 맞춰 심은 단정한 푸른 잎들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만천하에 외쳤다. 동시에 잔디는 스포츠 세계를 평정했다. 수천 년 동안 거의 모든 종류의 땅에서 경기를 했다. 하지만 지난 200년 동안, 축구와 테니스 같은 진짜 중요한 경기들은 잔디밭에서 열렸다. 물론 돈이 있다는 전제에서 그렇다. 리우데자네이루의 빈민가에서는 장차 브라질 축구를 짊어질 어린아이들이 모래와 흙 위에서 임시방편으로 만든 공을 찬다. 하지만 잘사는 동네에서는 부잣집 아들들이 공들여 관리한 잔디밭에서 축구를 즐긴다.

인류는 이런 식으로 잔디를 정치권력, 사회적 지위, 경제적 부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19세기에 부상한 자본가 계급이 앞다투어 잔디를 깐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은행가, 변호사, 기업가 들만 자신들의 사적 거주지에서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중산층의 폭이 넓어지고 잔디 깎는 기계와 자동스프링클러가 발명되자, 갑자기 수백만 가구가 자기 집 마당에 잔디를 깔 수 있게 되었다. 미국 교외의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밭은 부자의 사치에서 중산층의 필수품으로 바뀌었다.

도시 교외 지역 주말예배 의식에 새로운 행사가 추가된 것도 이때부터다. 사람들은 일요일 아침 예배가 끝난 뒤 혼신의 힘을 다해 자기 집 잔디를 깎았다. 길을 걸어갈 때 잔지밭의 넓이와 잔디의 질만으로 그 집의 부와 지위를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이웃집에 뭔가 우환이 있다는 표시로 앞마당에 방치된 잔디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잔디는 요즘 미국에서 옥수수와 밀 다음으로 널리 재배되는 작물이고, 잔디산업(잔디, 퇴비, 잔디 깎는 기계, 스프링클러, 정원사)은 매년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인다.

잔디는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열풍으로 그치지 않았다. 루아르 계곡에 가본 적 없는 사람들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잔디밭에서 연설하고, 파릇파릇한 축구장에서 중요한 축구 경기가 열리며, 호머 심슨과 바트 심슨이 이번 주는 누가 잔디를 깎을 차례인지 싸우는 것을 본다. 전 세계 사람들이 잔디를 권력, 돈, 명성과 연관 짓는다. 잔디는 멀리멀리 퍼져나가, 지금은 이슬람 세계 한복판까지 정복할 태세이다. 카타르에 새로 지은 이슬람 미술관은 웅장한 잔디밭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잔디밭은 하룬 알 라시드(Haroun al-Rashid, 764-809, 아바스 왕조의 5대 칼리프)보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 회사가 그 공간을 설계하고 시공했고, 아라비아 사막 한가운데 있는 탓에 10만 제곱미터가 넘는 그 공간을 푸르게 유지하려면 엄청난 양의 담수가 필요하다.

한편 도하와 두바이의 도시 교외 지역에 사는 중산층 가구들은 자기 집 잔디밭에 자부심을 갖는다.흰 가운과 검은색 히잡만 아니면, 중동이 아니라 미국 중서부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잔디밭에 대한 이런 간략한 역사를 읽고 나서 꿈의 집을 계획한다면 아마 앞마당에 잔디를 까는 문제를 재고할 것이다. 물론 잔디를 까는 것은 여전히 당신의 자유이다. 하지만 당신은 유럽의 공작, 거대 자본가, 심슨 부부가 물려준 문화적 짐을 벗어버리고 일본식 정원이나 완전히 새로운 어떤 창조물을 상상할 자유도 있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처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에서 해당되어 다른 운명을 상상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과거의 영향을 피할 수 없으므로 이것이 완전한 자유는 아니지만, 약간의 자유라도 있는 편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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